니담(Joseph Needham)은 도가(Taoism)가 "과학과 모순되지 않은 유일한 신비주의"라고 칭탄한 바 있다. 나는 儒學을 “社會적 존재로서의 人間과 모순되지 않는 유일한 神秘主義”라고 말하고 싶다.
동서양의 현자들은 인간이 특정한 목적과 본성을 갖고 있으며, 이 본성에 따라 그의 에너지를 유도하지 않으면 그는 결코 心身의 건강과 행복에 이를 수 없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공리주의나 쾌락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가 더불어 동의하고 있는 인간의 충동과 그 실현에 대한 무제한의 허용과 약속과는 전혀 다른 이념적 지형이다.
儒敎는 인간의 삶이 의미와 목표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生物學적으로 결정된 것인 바, 인간의 선택과 임의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탄생으로 완전해진 것이 아니라 ‘본래 예비된(天命)’ ‘성장의 방향과 목표(性)’를 따라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 과정을 통해 인격의 건전성과 사회적 유대를 기약할 수 있다. 여기가 儒敎의 두뇌처이다. 이 지점이 자각되고 설득되지 않으면 儒敎의 그 수많은 가르침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의미는 오직 생활 속의 규율과 일상적 습관에 있다. 바로 그 신기할 것도 없고, 통속적인 바로 그 삶의 자잘한 현장이 의미가 구현되는 聖所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미와 존재를 ‘자신의 밖에서’ 추상적으로 찾으려는 유혹에 쉽게 빠진다. 中庸은 그것을 경계해 마지않는다. 道가 행해지지 않는 것은 목표를 현실 바깥에서 그리고 자신의 일상적 삶의 공간 밖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日常이 곧 聖事이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일을 하며, 휴식하는 바로 그 자리가 의미가 구현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나 위계는 거추장스럽다. 서원이나 사당은 없어도 좋다. 족보도 가부장도 필요하지 않다. 단 하나의 조건이라면 자신과 관계하고 동시에 타자와 관계하는 人間條件이 있을 뿐이다.
儒學은 바로 그 자잘하고 통속적인 日常 속에서 보상도 기대도 없이 올리는 자신을 향한 예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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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조가 쓴 <왜 동양철학인가> (문학동네, 2001) 여기저기서 짜깁기하여 인용한 글들입니다.
이 책만큼 유교를 불교를 장자를 쉽고 간단하고 정확하게 얘기한 책을 본 적이 없습니다.
특히, 한문 번역은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죠.
21세기를 사는 朝鮮人에겐 필독서가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한형조님의 다른 쿨한 책으로:
<주희에서 정약용으로> (세계사, 1996)
<중고생을 위한 고사성어 강의> (통나무, 1997)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여시아문, 1999)
등이 있습니다. <주희>와 <고사성어>는 영양가가 엄청 풍부해서 거의 ‘보약’이라고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