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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jubetea_대추차

Fox on the Run (or Nomad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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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x on the run
You scream and everybody comes a running
Take a run and hide yourself away
(Foxy on the run)
Foxy, Fox on the run and hide away"     - Sweet, the



“현대 자본주의가 무서운 건, 개인과 집단에게 어떤 위치를 부여함으로써 안정화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방향으로 달리게 함으로써 역동적인 안정화를 이루는 매커니즘이라는 점에 있다.”^1 멈추면 불안정해진다, 뒤진다, 는 메시지. 뒤쫓고 따라 잡는 것이며, 타인을 모델로 하면서 동시에 타인을 장애물로 여기고 뛰어넘는 것이랄까.

숨 가쁘다.


일정한 방향으로 열심히 달리는 편집증(paranoia)형을 자본주의 인간으로 보면서 그에 대(對)해 들뢰즈와 가타리가 내놓는 안티 개념이 분열증(schizophrenia)적 인간이다. 적분(integrate)이 아니라 미분(differentiate). 축적이 아니라 눈치보다 버리면서 도망가는. ^1.5


동생과 소주를 마시는데, 동생 왈: “다들 미친 거 같아, 미쳤어.” 동생이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치닫는 집값을 얘기하는 거지만. 가만히 보면 사는 모습들이 다 그렇다. 남가주의 인간군집 형태만 이런 걸까? 수입이 늘면 같이 늘어나는 지출. 더 많이 벌면 번만큼 세금 혜택을 받기 위해 더 큰 집을 사야하고 더 좋은 차를 사야 한다. 이만큼 이면 됐다, 라는 안정이 아니라 조금만더조금만더... 하는 방향성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안정이다. 이런 편집증의 달리기 대열에서 뛰고 있는 우리에게 “Priceless(값으로 따질 수 없어요)!”하면서 크레딧 카드가 가슴으로 응원한다.


자본주의는 더 이상 하나의 완결된 체제가 아니다. 너무 역동적이라서,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처럼 무너질 그런 방정식 속의 한 단계가 되기엔 세련됨이 돋보인다. 더구나, 로칼 히스토리에 지나지 않았다던 마르크스의 예언은 글로벌리즘이 판을 치는 요즘엔 약발타령조차도 못하고 있다. (유태인들의 예언은 다 이 모양인가?) 내부의 모순과 부조리를 혁명으로? 배 떠난 항구, 라고 아시는지.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죽일 놈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샌디에고의 바에서 영국산 흑맥주를 마시며 재즈를 쌩으로 듣는 즐거움이라든지, 책 몇권과 랩탑이 있으면 카페에서도 라테를 마시며 페이퍼를 쓸 수 있는 환경(wireless)이라든가, ... (더 이상 생각이 안나는 게 프롤레타리아트인 나의 한계다) 디즈니랜드나 맥도날드는 유년기의 우리에게 ‘추억’을 각인시키기도 한다. 자본의 논리가 무식하게 (착취! 하는 식으로) 그냥 작용하지 않고, 도시 공간과 우리의 쾌락을, 미적 감각을 공략함으로써 실현된다는 말이다. 자본은 유쾌함과 건강과 안락함과 심미적 만족감을 생산하는 쿨한 놈.


“다양하게 산란될 흐름을 편집증적인 방향지움에 의해 한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자본주의. “잘 살아보세”의 새마을 운동, 그리고 박정희의 미소. 재고정리와 신상품검사/확장을 위해 어딘 가에서든 ‘국지전’이 필요한 자본주의지만, ‘Yuppies,‘ ’DINK,‘ ’BOBO‘^2 하면서... 삶의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섹시하기까지 하다. 타이트한 청바지 속에서 살랑살랑 움직이는 방긋한 엉덩이가 떠오르네. (더 이상 떠오르는 게 없는 것이 순진한 나의 한계다)


이런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힘을 “가족+교회” 그리고 “가족+학교”라는 방식으로 설명해 들어가는 모습도 섹시하기는 마찬가지. ^3

‘외디푸스 신화’란 게 있다. 텔레비전의 삼류 미니 시리즈 같은 이야기. 아들이 살아갈 모델이자 이겨야할 경쟁자가 아버지란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편집증을 재현하는 신화이기도 하다. 교회의 교리는 외디푸스 가족을 감싸며 용서와 감사와 구원을 선사하고, 학교는 국가(state)라는 ‘폭력’의 정당성을 주입시켜 눈물 없이는 부를 수 없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게 한다. 불법체류자는 불안하다. 주민증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은 맷집으로 견뎌내고, 편집증의 극단을 보여주는 교회의 대형화와 선교주의를 통한 팽창에 동참하면서, '엄마의 품'을 쟁취하기 위해 오늘도 달린다.

.... 분열증적 인간(Schizo-kids!)에겐 피곤한 시츄에이숀이다.


수직으로 만들어진 이 바닥을 무시하고 수평화 시켜가며, 주어진 라인에서 삐져나와 달리기를 거부하고 딩가딩가 걸어간다. 정착이 아니라 유목을 통한  ‘다양함의 확충’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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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용하는 글들은 <도주론(逃走論)>(아사다 아키라, 문아영 옮김, 민음사, 1999)에서 - “잘 살아보세”는 아니고. 책 중의 대담부분을 읽고서.

^1.5, 들뢰즈(Gilles Deleuze)와 카타리(Felix Guattari)그리고 마쑤미?(Brian Massumi)의 공저라는『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천의 고원>)의 주제라고 하는데, 못 읽어봤다. 걍, 이정우의 책을 읽고 알았음.

^2, ‘Yuppies(Young Urban Professional),‘ ’DINK(Double Income No Kids),‘ ’BOBO(Bourgeois Bohemian)‘ 『BOBOS in Paradise』라는 재밌는 책이 있다. http://flakmag.com/books/bobos.html 참고.

^3, 알튀세르(Louis Althusser)라는 사람의 이론이라고 한다.